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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있는 풍경

역사와 이야기가 아름다운 섬, 거문도

전라남도 여수에서 뱃길로 두 시간 남짓. 바다 향 가득 맡으며 도착한 거문도는 세월이 멈춘 듯 고요했다. 자동차와 사람으로 붐비는 도시를 벗어나 찾은 이 작은 섬에서 봄 자락에 피어난 동백꽃과 유채꽃, 그리고 싱그러운 바닷바람을 만났고, 아무렇게나 흩뿌려놓은 듯한 주변 섬들은 바둑판처럼 정형화된 도심에서는 찾을 수없는 무언가를 가슴 속에서 꺼내도록 했다.

우리나라 남서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섬 거문도. 총면적이 12㎢ 밖에 되지 않는 거문도는 본섬인 고도, 동도, 서도와 함께 천혜의 항구 역할을 하는 도내해, 그리고 부속 섬인 삼부도와 백도군도로 구성돼 있다. 옛날에는 삼도, 삼산도, 거마도 등으로 불렸으나 중국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섬내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 많다 하여 ‘거문(巨文)’으로 개칭하도록 우리나라에 권유해 그때 부터 ‘거문도’로 이름 지어졌다 한다. 한때 영국에선 이 섬을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라 부르기도 했다.

거문항에 있는 여객선터미널에서 내리면 뒤편으로 서도가 보인다. 서도에는 덕촌리의 주택들이 알록달록한 지붕색으로 이국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거문도는 섬이 두 팔을 벌려 본도를 감싸 안고 있는 형상을 띠고 있어 포근함과 안정감이 더하다.

군사 요충지이자 동양 최대의 어업기지
거문도는 남해의 한가운데, 제주도와 여수의 중간 지점에 있어 어업과 군사 전략상 중요한 곳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거문도항은 빈번히 열강의 침입을 받아왔다. 1885년 영국안 러시아 제국의 세력을 막는다는 구실로 이곳을 불법 점거하는 ‘거문도 사건’을 일으 켰다. 이때 지어진 이름이 포트 해밀턴이다. 1887년 이들이 철수한 이후에는 일본이 이곳을 어업기지이자 행정의 중심지로 개발했다.

지금은 남해 어업기지로서 전국의 어선들이 몰려들고 있다. 특산품으로 은색 갈치를 꼽고 있으나 그외에도 돌돔, 참돔, 감성돔, 벵에돔, 혹돔, 능성어, 방어, 재방어 등의 어류들과 다양한 아열대성 어류들이 서식하고 있다. 덕분에 거문도의 식당에선 다양한 자연산 회를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있다. 물론 거문도 명물인 갈치구이, 갈치조림을 맛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거문도의 수중세계는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는 연산호와 해송 등을 포함한 남해안 특유의 화려한 산호 생태계가 관찰 되고 있어 스쿠버 다이버들에게 인기 높은 명소다.

바람과 꽃향기에 취해 거니는 트레킹 코스
거문도의 고도와 서도를 이어주는 유일한 다리인 삼호교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면 동양 최대, 남해안 최초의 거문도 등대로 갈 수 있다. 거문도 등대로 가는 길은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트레킹 코스 중 하나이다. 거문도 트레킹 코스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서도를 남북으로 종주하는 종일 코스와 불탄봉에서 신선바위, 보로봉, 거문도 등대로 이어지는 5~6시간 코스, 그리고 유림해, 신선바위, 보로봉, 거문도 등대로 이어지는 3~4시간 코스로 나뉜다.

일단 필자는 유림해변을 거쳐 가는 코스를 정하고 걷기 시작했다. 삼호교를 건너 20분쯤 걷다 보면 유림 해수욕장이 나온다. 아직 개장 전이라 해수욕장 본연의 모습을 찾아보긴 어렵지만 시원한 바닷 바람과 고운 모래가 인상적이다. 이곳에서 운이 좋으면 일출도 볼 수 있다고 하니 부지런한 사람들은 새벽녘에 다시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해변을 지나면 수월산의 들머리가 보인다. 30분 정도 올라가면 눈부시게 펼쳐진 다도해를 감상할 수 있다. 멀리 보로봉의 정상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신선바위가 보인다. 나룻배와 등산을 하는 여행자에게 비치는 모습이 모든이에게 포근하게 느껴진다 하여 신선바위라 명명됐다고 한다. 이곳에서 둘러보는 경치는 실로 절경이다. 설화에 따르면 하늘의 신선이 반하여 매일같이 내려와 바둑을 두고 풍류를 즐겼다고 하니 그이야기가 실감난다. 그래서 신선바위를 강선암(降仙巖)이라고도 일러 부르나 보다.

신선놀음을 뒤로 하고 365계단을 내려오면 목넘어해안이 나온다. 풍랑이 거세지면 물이 넘나든다 해서 ‘목넘어’라고 이름 붙여진 이곳에선 강태공들의 낚싯대를 쉽게 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 거문도 등대까지는 동백숲 터널이 대부분이다. 3월 동백꽃이 절정일 때는 꽃향기에 취해 선계로 들어가는 듯 느껴진다고 한다. 걷는 중간에 선바위도 보이고 보로봉 절벽능선도 볼수 있다.

마음도 비춰주는 거문도의 등대
그렇게 걷다 보면 거문도 등대에 도착할 수 있다. 1905년에 세워진 거문도 등대는 국내에서 인천 팔미도 등대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등대다. 해발 196m에 자리 잡고 있으며 등탑 높이는 6.4m에이른다. 프랑스제 프리즘 렌즈를 사용한 3등대형으로 수은통에 등명기를 띄우고 중추로 회전시켜 15초 간격으로 약 42km 거리 에서도 볼 수 있는 불빛을 뿜어냈었다고 한다.

현재는 높이 33m짜리 새로운 등탑에 업무를 물려준 후 쉬고 있지만, 100년의 세월을 머금은 고귀한 자태는 ‘거문도 등대가’라는 노래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다. 이곳이 인기가 높은 이유는 등대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변의 조망도 분명 한몫을 했을 듯하다. 등대의 절벽 위에 멋들어지게 세워져 있는 관백정에서는 남해의 절경을 즐길 수 있다.

거문도에는 이곳 말고 또 하나의 등대인 녹산 등대가 있다. 거문도 등대가 서도의 최남단에 자리 잡고 있다면 녹산 등대는 최북단에 우뚝 서 있다. 이 등대는 1958년에 세워진 무인등대로 손죽도, 초도, 장도 등 다도해의 수많은 섬을 하루도 빠짐없이 비춰주고 있다. 어느 여행객은 거문도 등대 가는 길이 남성적이라면 녹산 등대가는 길은 옷고름을 풀어 헤친 듯 봉긋봉긋한 ‘초원’을 가로지 르는 여성적인 길이라 했다. 

거문도 등대로 가는 길이 시끌벅적한데 비해 녹산 등대 가는 길은 항상 외롭고 고독하다. 백도, 거문도 등대와 같은 유명한 관광지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6~7km를 걸어 넘어야 하는 일도 만만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탁 트인 바다를 풍경 삼아 걷는 이 코스도 거문도 여행에서 놓치면 후회할 코스로 꼽히고 있다. 많은 이들이 거문도 등대와 함께 녹산 등대를 둘러보는 것이 거문도 관광의 완성이라 칭송하는 이유일 것이다. 또한 녹산 등대로 가는 길에 인어 전설을 주제로 한 인어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덴마크의 인어공주와 거문도의 인어는 어떻게 다른지 직접 확인해 보자.

슬픈 사랑이야기로 만들어진 남해의 절경, 백도(白島)
거문도를 여행하면서 백도를 돌아보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으랴. 백도는 거문도에서 서쪽 28km 지점에 우뚝 솟은 36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무인군도다. 상백도와 하백도로 나뉘어 있으며 높고 낮은 바위벽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 90 여개의 바위봉우리가 솟아있어 그 아름다움이 서해의 홍도와 견줄만한 명소 이다. 현재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81년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백도는 하선하여 육로 관광을 할 수 없고 유람선으로 둘러볼 수밖에 없다. 유람 선은 대부분 거문도항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여객선이 도착하면 바로 출발하는데 약 2시간 30분간 백도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다만 120석의 작은배라 파도가 높으면 심하게 요동하니 멀미에 단단히 대비하는 것이 좋다.

백도는 왕관바위, 서방바위, 삼선바위, 도끼바위 등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한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감동을 준다. 백도에는 기암괴석뿐만 아니라 천연기념물인 흑비둘기를 비롯해 30여 종의 조류와 풍란, 석곡, 눈향나무, 동백, 후박 나무 등 353종의 아열대식물이 분포하고 있고, 연평균 수온이 16.3℃로 큰붉은 산호, 꽃산호, 해면 등 170여 종의 해양생물(동물 126종, 식물 44종)이 서식하고 있어 그야말로 생태계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백도의 수많은 기암석에는 슬픈 전설이 담겨 있다. 먼 옛날 옥황상제의 아들이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 하늘에서 쫓겨나 바다로 내려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용왕의 딸과 사랑에 빠져 바다의 풍류를 즐기며 세월을 보냈다. 이를 안 옥황상제는 아흔여덟 명의 신하를 보내 아들을 다시 하늘로 데려오라 명하였다. 그러나 신하들마저 돌아오지 않고 풍류를 즐기고 있자 화가 난 옥황상제는 벌을 내려 신하들까지 모두 바위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이 오늘날 ‘백도군도’다. 그래서 백도에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바위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하며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들이 많다.

그 외 거문도의 볼거리
거문도는 보통 하루, 이틀 코스로 관광을 오기 때문에 구석구석을다 둘러보기 쉽지 않다. 서도 일주 코스와 백도 관광만 마쳐도 1박 2일이 금세 지나간다. 시간을 쪼개서 좀 더 거문도를 느끼고 싶다면 녹산 등대로 가는 길에 잠시 서도마을을 가보는 것도 좋다.

원래 서도마을은 일본인들이 고도에 정착하기 전까지 거문도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다. 이곳에는 거문도 뱃노래 전수관이 있다. 어민들이 고기를 잡으며 부르던 노동요로 주민들 사이에서 구전되어 오고 있는 <거문도 뱃노래>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북, 장구, 꽹과리 반주에 맞춰 선소리꾼이 ‘어야디 야’ 소리를 매기면 다른 뱃사람들이 뒷소리를 받는 노래로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고도에 있는 거문도 역사공원에는 영국군 묘지가 있다. 항구에서 30분 남짓, 동백꽃과 유채꽃 피어있는 아기자기한 길과 돌계단을 감상하며 걷다보면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다. 공원에 도착하면 묘비와 나무 십자가가 맞이하는데 이 화강암 묘지는 1886년 거문도 점령 중에 탄약사고로 사망한 2명의 군인을 위해 세운 묘지라고 한다. 100년이 넘는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깎여 있어 또 다른 풍미를 느끼게 한다. 영국군 묘지는 당시 치열했던 열강들의 세력다툼 속에 끼어서 영토를 점령당해야 했던 쓰라린 역사의 흔적이다.

역사공원에서 내려오다 보면 거문도 해양케이블 육양지점을 볼수 있다. 거문도는 영국 점령당시인 1885년 중국 상해까지 해저케이블이 포설된 바 있다. 지금은 흔적으로만 남아있지만 육양지점은 거문도가 울릉도와 함께 극동의 통신 요충지였음을 뜻하는 중요한 기념물이다. 이 외에도 거문도에는 거문진 터, 서도(이금포) 피서지, 귤은 서당, 동도, 박옥규 제독 송덕비, 신사터, 서산사 등 곳곳에 숨어있는 볼거리가 관광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거문도는 이야기가 가득한 섬이다. 백도의 전설은 물론 영국 수병과 거문도 처녀의 눈물겨운 사랑이야기도 마을 사람들에게 들을수 있다. 서양의 인어는 지나가는 뱃사람을 노래로 홀려 잡아먹지만 거문도의 인어는 태풍으로부터 어부들을 구한다. 이런저런 섬에 흘러나오는 이야기와 함께 동백꽃, 유채꽃 가득한 섬을 여행하 다보면 사람들이 왜 거문도가 제주도보다 아름답다 탄성을 지르 는지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