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의 섬, 완도와 보길도를 거닐다.
서울에서 6시간 남짓. 완도에 도착해 배를 타고 동천항으로 향한다. 예전에는 보길도로 직접 가는 배편이 있었으나, 다리가 생긴 이후에는 노화도에 있는 동천항에 내려 차편으로 이동한다. 보길도로 가는 길은 완도를 통하는 길 외에도 해남 땅끝 마을에서 가는 방법도 있다.
예송리 해변에서 바라본 일출. 바다에 떠 있는 어선은 전복 양식장을 관리하는 주민들의 배이다.
자연과 인공이 함께 조화로운 멋을 보여주는 세연정.
고산의 풍류를 느낄 수 있는 보길도 원림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로 유명하다. 고산은 선대가 물려준 막대한 부를 이용해 십이정각(十二亭閣), 세연정(洗然亭), 회수당(回水堂), 석실(石室) 등을 지어놓고 풍류를 즐기며 삶을 보냈다. 실제로 보길도를 돌아보면 그가 얼마나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을까 하는 부러움과 감탄이 공존한다. <어부사시사>를 포함한 수많은 문학 작품의 배경에 보길도의 절경과 세연정을 포함한 ‘보길도 윤선도 원림’도 한몫을 했음에 분명하다. 보길도 윤선도 원림은 대한민국 명승 제34호로 지정됐을 정도이니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다.
보길도에 도착하면 고산의 흔적을 따라가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일단 윤선도 유적지로 향한다. 이곳에서 윤선도의 이야기를 담은 전시관을 먼저 접할 수 있는데 이곳 또한 별천지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전시관이나 고산의 작품세계와 완도, 보길도의 역사, 환경 등을 멋지게 꾸며 놓아 볼거리가 풍부하다. 조선 시대 천재의 문학과 현대의 IT 기술이 접목되어 관람객에게 다양한 정보와 흥미로움을 선사한다.
전시관을 나와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걷다 보면 세연정에 다다른다. 세연정은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통해 자연과 사람이 하나가 되도록 한 고산의 뛰어난 안목을 볼 수 있는 곳이다.가는 길목부터 신선들의 놀이터와 같은 느낌을 잔뜩 풍긴다. 자연과 인공이 교묘히 접합된 이곳은 자연 못(세연지)과 인공 못(회수담)을 태극무늬로 휘감아 돌리고 복판에 정자가 열십자각으로 지어져 있다.
가는 곳곳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며 신선들과 바둑이라도 한 판 두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네모난 인공 못인 회수담에선 무희들과 함께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다.
회수담에 물을 담아두기 위해 만든 판속보는 물이 넘칠 때는 폭포, 물이 없을 때는 다리 구실을 했다고 한다. 세연정 북쪽에는 동대와 서대라는 두 개의 무대가 있는데, 그곳에서 고산은 기녀들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고 관람하였다고 한다. 가야금 연주에 맞추어 하늘거리는 곡선을 뽐내며 춤을 추는 기녀들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세연정 주변에는 칠암이라고 부르는 7개의 큰 바위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이름마다 하나의 이야깃거리로 손색이 없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 했던가. 바위에 걸터앉아 연못에 비친 하늘을 바라보자니 시상이 절로 떠오른다. 이런 분위기가 고산을 ‘버림받은 정치인’에서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거듭나게 했을 것이다.
고산의 삶이 묻어 있는 터전
세연정에서 30분 정도 걷다 보면 낙서재와 곡수당이 나온다. 이곳은 세연정에서 멋을 즐기던 고산이 살림했던 곳이다. 이곳은 고산이 1637년에 들어와 1674년까지 살았으며 무민당 등 건물 4채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모두 소실되고 집터만 남아 있다. 낙서재 건너 개울가에는 고산의 아들 학관이 조성한 초당, 석정, 석가산, 평대, 연지, 다리, 화계 등이 좌우로 조성되어 있다.
고산 윤선도의 독서실 동천석실은 산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동천석실.
낙서재에서 멀리 앞산을 바라보면 산 중턱에 조그마한 건물 두 채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동천석실인데 고산이 차를 마시며 책을 읽던 독서실이었다고 전해진다.
수림이 울창한 오솔길을 오르다 보면 마주할 수 있는데 바위 사이에 지어져 있는 두 채의 정자가 산수를 즐기는 데 그만이다. 저녁 해 질 무렵 석실에서 차를 다리기 위해 불을 지피면 피어오르는 연기가 마치 신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석실묘연’이라고 불리며 보길도 8경 중 하나로 칭해진다. 석실에 앉아 땀을 식히며 뒤를 돌아보면 낙서재가 있는 부용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실로 신선이라도 내려와 낮잠을 청할 법한 곳이다.
보길도에서는 우암 송시열의 유적도 만날 수 있다. 이 또한 아이러니한 역사를 말해준다. 고산과 우암 모두 제주도를 향하다 한 사람은 정착하고 한 사람은 풍랑으로 잠시 머물렀던 곳인데 이 둘은 예송논쟁으로 정적이 되었다. 우암 선생이 1689년 조선 시대 숙종 때 제주도로 귀양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상륙했던 백도리 해변 절벽. 그곳에 가보면 바위에 새겨져 있는 글귀를 볼 수 있다. 이 바위를 글씐바위라고 하는데, 눈부신 전망에 반해 새겨져 있는 시에는 조선 시대 문장가 우암 송시열의 한이 서려 있다. 수백 년 세월의 풍파에 깎였음에도 새겨진 글귀는 대략 판독이 가능하다. 단 무분별한 탁본 탓인지 검은 먹 자국이 바위에 남아 안타깝다.
바위에 새겨진 시문은 “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팔십삼세옹창파만리중) / 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일현호대죄 삼출역운궁) / 北極空瞻日 南溟但信風(북극공첨일 남명단신풍) / 貂絿舊恩在 感激泣孤衷(초구구은재 감격읍고충)”이라 적혀 있는데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여든셋 늙은 몸이 푸른 바다 한 가운데 떠 있구나.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세 번이나 쫓겨난 이도 또한 힘들었을 것이다. 대궐에 계신 임을 속절없이 우러르며 다만 남녘 바다에 순풍만 믿을 수밖에. 담비갖옷 내리신 옛 은혜 있으니 감격하여 충정으로 흐느끼네.”
우암 송시열이 시문을 새겨놓은 글씐바위. 먹 자국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예송리 해변 주변에 있는 전망대에서 바라본 보길도 바다. 전방에 보이는 큰 섬의 이름이 예작도다. 그 외에 당사도, 소도, 복생도 등의 섬을 볼 수 있다.
다도해의 낭만과 전복 양식장이어우러진 바다
역사 유적지를 돌아봤으면 보길도의 자연경관을 느껴볼 차례다.
보길도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섬에는 중리, 통리, 예송리 해수욕장이 있어 피서객에게 인기다. 중리, 통리 해수욕장은 매우 깨끗하고 한적하며 모래사장 뒤편으로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어 멋들어진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예송리 해수욕장.
다들 독특한 풍광과 느낌을 자랑하고 있으나 보길도 하면 역시 예송리 해수욕장이 가장 멋지다. 예송리 해수욕장은 활시위처럼 휘어진 약 1.4km의 해변에 타조알 크기에서부터 바둑알 정도 크기의 조약돌이 깔렸으며 해안선을 따라 많은 상록수림이 조성되어 자연 그대로의 공간으로 쉴 곳을 제공한다. 이 상록수림은 천연기념물 제40호로 수령 약 300년을 자랑하는 나무들이 빼곡하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그야말로 절경이어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고 한다. 해변 앞에 넓게 펼쳐져 있는 전복 양식장과 그를 관리하기 위해 떠 있는 어선들의 조화도 또 다른 운치를 선사한다.
보길도는 전복 전국 생산량의 80%를 차지하는 완도군에서 가장 활발하게 양식이 이뤄지는 곳이다. 그 때문에 바다마다 전복 양식장이 즐비하다. 특히 이곳에서 양식되는 해산물들의 품질이 우수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데 이는 이곳의 지형에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길도는 조류의 흐름이 빨라 전복의 살집이 탄탄하며 바닥에 몽돌이 깔려 있어 전복이 함유한 성분도 특별하다는 평판이 자자하다. 이곳 주민의 말에 따르면 마을마다 오수처리 시설이 잘 되어 있어 오염 없는 청정해역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 보길도에 있는 식당에서 전복을 맛보면 서울에서 느낄 수 없는 싱싱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예송리의 일출이 멋지다면 일몰은 땅끝 전망대다. 낙조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이곳은 보길도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 중 한 곳이며 그 바로 옆에 공룡알만한 돌들이 그득하다고 이름 붙여진 공룡알 해변도 찾아볼 수 있다.
완도의 드라마세트장과 신지도 명사십리 해수욕장
보길도 여행만으로 아쉬움이 남는다면 돌아오는 길에 완도와 신지도에 잠시 멈춰보는 것도 좋다. 완도는 ‘장보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그래서인지 청해진 유적지와 더불어 장보고 이야기를 그렸던 드라마 ‘해신’ 촬영지가 잘 갖춰져 있다. 드라마 세트장은 소세포 촬영장과 불목리 촬영장 두 곳이 있다. 소세포는 옛포구를 재현해 놓은 곳이고 불목리는 당나라의 거리를 재현해 놓은 곳이다. 이곳에선 ‘해신’ 외에도 다양한 드라마가 촬영되어서 사극 팬들에게 인기다. 신라방 드라마 세트장과 청해포구 드라마 세트장 등을 둘러보며 그 시대의 인물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완도시 전경.
완도 군청 뒤에 있는 높이 76m의 완도 타워도 볼 만하다. 2008년 9월 준공된 이 탑은 완도 전경이 한눈에 보이고 여러 가지 테마 정원을 꾸며놓았다. 완도는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곳이다. 바닷가 전체가 황금 낚시터여서 낚싯대를 드리우는 대로 손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감성돔, 우럭, 도다리, 광어, 농어 등이 잘 잡힌다.
완도를 빠져나와 잠시 신지도에 들려보자. 신지도는 뭐니뭐니해도 명사십리 해수욕장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은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중 가장 유명한 곳으로 이름 그대로 십 리(약 3.9km)의 길이로 펼쳐져 있는 백사장이 일품이다. 이곳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이면 백사장의 울림소리가 들린다 하여 모래가 운다는 뜻의 명사(鳴沙)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모래는 우는 것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모래찜질을 하면 신경통, 관절염, 피부질환 등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나서 휴가철에는 북새통을 이룬다. 백사장 뒤에 있는 해송 숲도 이곳의 자랑으로 여유로운 바닷가를 원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해변이다.
휴가철 성수기를 피해 초가을에 찾은 보길도는 매우 한적하고 아름다웠다. 여름내 북적였을 해변과 원림은 고산이 머물렀을 그때처럼 잔잔함과 풍요로움을 선사했고 남은 섬주민들은 바다의 품에서 소중한 양식을 얻어내고 있었다. 도심에서의 일상생활을 힐링하고 싶다면 북적이는 한여름보다는 한적한 초가을의 보길도가 안성맞춤일 듯하다.
청해포구 촬영장.
명사십리 해수욕장. 3.9km 길이로 펼쳐진 백사장이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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