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가 인정해 준 39일만에 완성된 걸작.
지 난 2월 27일에 열린 제 77 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많은 전문가들은 영화 '에비에이터'의 선전을 예상했었다. '에비에이터'는 아카데미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갖춘 듯 보인 영화였다. 아메리칸 드림, 영웅, 사랑이라는 테마를 완벽하게 보여준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상대에서 봉투가 열리고 트로피를 손에 쥔 사람은 '마틴 스콜세지'가 아닌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다. 아카데미가 변하고 있음을 증명해 주는 좋은 결과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누구인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대부분의 영화 팬들은 그에 대한 이미지라면 '카우보이 모자에 판초우의', '시가를 문 잔뜩 찌푸린 표정', '서부의 고독한 총잡이', '마카로니 웨스턴의 대명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첫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받았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도 겉으로만 보기에는 이런 서부영화와 비슷한 그림이 그려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의 다른 면을 보게 된다면 어떨까? 비밥 재즈의 창시자 '찰리 파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버드'를 제작할 정도의 재즈광인 그는 아카데미에서 배우로서의 상을 탄 경험은 없지만 '용서받지 못한 자'로 이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76회 아카데미에서도 '미스틱 리버'라는 영화로 유력부분 후보에 올랐던 명감독이다. (당시에는 '반지의 제왕'에 밀려 '숀 펜'의 남우주연상과 '팀 로빈스'의 남우 조연상에 만족해야 했다.)
이제 이러한 배경을 들었으니 서부영화의 방랑 총잡이 이미지를 던져 버리고 영화를 감상해 보자.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이 영화는 매우 수작이다. 결코 아카데미가 나이 먹은 늙은 감독에게 동정표를 던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영화 보는 내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유능한 늙은 트레이너와 나이 많은 여자 복서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록키'류와 같은 복싱영화는 결코 아니다. 영화 내내 복싱경기 장면과 트레이닝 장면이 수도 없이 등장하지만 초점은 그 쪽에 있지 않다. 감독은 복싱을 통해 인생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인생의 좌절과 고통을 복싱을 통해 해소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주인공을 통해 인생의 정의를 찾아주려 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흘러나오는 '모건 프리먼'의 나래이션은 그 것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감독은 영화의 전개를 '성공-좌절-만남-기회-성공-좌절-죽음'의 순으로 끌어나간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성공은 '록키'에서 보여줬던 아메리칸 드림과는 거리가 멀다. 분명 성공이긴 하지만 영화에서 성공은 좌절과 실패를 안겨주기 전의 과정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또 하나, 영화의 주연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힐러리 스웽크'이지만 놓쳐서는 안될 부분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모건 프리먼'이다. 이 나이 많은 흑인 배우의 연기와 나래이션은 영화의 중심을 단단하게 받쳐준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호흡을 맞춰 멋진 영화를 만들었던 그는 이번 영화에서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영화는 특히나 '나이 듦'에 무게를 두고 있는 영화이니 그의 비중이 더욱 크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역시 훌륭한 조연이 없는 훌륭한 영화는 없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스크린을 통해 성공과 실패, 기쁨과 좌절은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 것을 견디고 이겨내는 방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스크린 앞에 있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질 뿐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편안함을 안겨준다. 잔잔하게 그러나 인생의 극과 극을 보여주는 영화를 보며 자신의 인생을 고민 할 수도 있고 주인공들의 아픈 삶에 함께 눈물을 흘려줄 수도 있다. 그리고 관객은 가슴 한 곳 가득 그런 생각을 가득 담고 극장을 나서게 된다.
얼마 전 신문지상에서 '한국영화, 아카데미를 이기다'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한국 극장가에 아카데미 특수가 사라지고 한국영화가 흥행면에서 선전을 하고 있다는 기사였는데, 기사는 ‘흥행이 잘되면 이긴다’라는 극적 표현을 내세움으로 해서 한국영화의 우월성을 나타내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극장에 걸린 한국영화는 개인적으로 생각해서 좋은 영화가 한 편도 없었다.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묻혀있는 명작들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런 기사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게 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같은 명장도 '밀리언 달러 베이비'같은 명화도 나올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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