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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위로 걷다/기자 명함 내세운

[기자수첩]버려진 한민족의 혼(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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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버려진 한민족의 혼(魂)
강원도 강릉 굴산사지의 문화유적들을 바라보며
 
반만년 역사, 한민족, 백의민족. 충효사상. 이런 것들은 흔희 한민족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말들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거창한 단어들을 나열하기에 앞서 우리가 과연 한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듯하다.
 
지난 25일 100권 독서클럽의 독서여행으로 찾아간 강원도 강릉시의 '굴산사지'. 이곳에서 바라본 한민족의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민족의 혼을 저렇듯 버려두고서 어디서 긍지를 느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굴산사지는 일단 찾아가는데도 애를 먹였다. 관광 안내소는 둘째 치고 표지판 하나 제대로 된 것을 찾기 어려웠다. 어디가 어디인지 몰라 헤매기를 수십 분. 결국 지역민에게 문의한 결과 돌아온 대답은 "물속에서 물을 찾으면 어쩌냐"는 대답이었다.

우리가 서 있던 그 곳이 바로 굴산사지였다. 일행 모두 카운터펀치를 맞은 것 마냥 멍 할 따름이었다. 아무리 폐사된 절터라지만 사찰당우 반경이 300m에 이르렀고 200명이 넘던 승려들이 수련하던 고려시대 최대 절이라는 느낌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굴산사지에 있는 보물 85호 부도를 접한 후에는 쥐어짜는 듯 슬픔이 몰려왔다. 마을 뒷동산 한 구석 외롭게 서있는 부도는 외로움과 처량함이 그득했다.
 
부도를 둘러싼 낮은 울타리와 간단한 안내 표지판 하나. 친구라고는 이들 밖에 없어 보이는 부도는 왜 이제 찾아왔느냐고 물어보는 듯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습도 어딘가 어색했다. 아마도 오랜 세월에 망가진 형상을 근대에 와서 복원한 듯했는데 재질은 물론 색도 일치하지 않아 '대충'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올랐다.
 
부도를 본 후 아픈 가슴이 사라지기도 전에 굴산사지 안내판이 다시금 뒷골을 서늘하게 했다. 안내판 전체에 시뻘건 녹이 슬어있고 뜬금없는 통행금지라는 표지판 하나가 안내문을 가리고 있었다. 누가 봐도 어쩔 수 없이 만들어 놓은 후 전혀 관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하튼 안내판을 보고 걸음을 재촉해 국내 최대 규모의 보물 86호 당간지주를 마주쳤다. 여타 절에서 볼 수 없었던 그 웅장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당간지주의 높이가 5.4m라니 굴산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감탄도 잠깐, 부도와 마찬가지로 안내문 하나와 함께 허허벌판에 홀로 외롭게 서있는 이 문화유산 앞에서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민족의 혼이 담긴 문화유산이 찾는 이도 별로 없는 곳에서 싸늘한 모습으로 그러나 당당하게 서있는 모습에 서글픔이 몰려온 것.
 
당간지주의 원래 모습이 어땠는지 알아볼 수 있는 그림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불사나 법회를 알리는 당간(幢竿)을 걸어두었던 당간지주. 그 모습이 너무나 궁금했지만 무엇도 마련돼 있지 않았다. 그나마 안내문의 몇 자는 지워져 있기까지 했다.
 
이날 굴산사지에서 마지막으로 찾은 '강릉굴산사지석불좌상'은 더욱 심각했다. 마을 한 구석에 심하게 파손돼 있는 모습으로 앉아있는 이 불상은 말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며 무심코 지나쳐 버릴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얼마 전 일본에 갔을 때 매우 부끄러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문화재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그들 자체를 천시하기로도 유명하다는 말이었다.
 
현실을 직시한 후 느껴지는 가장 큰 생각은 한민족의 혼은 버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정부를 탓할 것만은 아니다. 문화재와 함께 살고 있는 지역민은 물론 대한민국인 누구나 문화재에 대한 자부심과 소중함을 갖는 것만으로 하나 둘씩 버려져가는 민족의 혼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인류의 역사는 커다란 하나가 되기 위한 행진이다"라고 했다. 역사를 천대시하면서 세계 속 커다란 대한민국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