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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있는 풍경

아리수의 원류(源流) 동강과 평창강이 만나는 곳, 강원도 영월

대한민국의 지리적 특징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는 한반도 지형.

강원도 영월은 2006년 개봉해 많은 인기를 끈 영화 ‘라디오 스타’의 촬영지로 잘 알려졌다. 이곳에 들른 사람들은 버글스(Buggles)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와 함께 영화에 나온 장소들을 찾아 인증 사진을 찍는 것을 즐긴다. 하지만 영월은 단순히 인기 영화의 촬영지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아쉬운 고장이다.

영월은 강원도 정선에서 시작한 동강(東江)이 오대산 남쪽에서 시작한 평창강(平昌江)과 합쳐져 남한강(南漢江)을 이루는 지역이다. 즉 우리나라 수도인 서울에서 쓰고 마시는 물의 원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의 손에 모든 것을 빼앗긴 단종의 마지막을 함께한 고장이다. 

장릉을 들어서면 단종의 이야기를 알아볼 수 있는 역사관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영월 취재를 의뢰받은 후 가장 먼저 이 시가 떠올랐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놋(간)다.”

단종을 유배지까지 압송을 담당했던 금부도사 왕방연의 안타까움이 가득한 이 시구를 머릿속에 되뇌며 강원도 영월 여행을 시작한다.


강 따라 계곡 따라 물 흐르듯 즐기는 영월 여행

4월 중순의 영월은 게으른 봄 처녀의 옷깃을 잡아끌며 길을 재촉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아직 벚꽃도 채 지지 않은 도로에 여기저기 분홍 복사꽃이 어우러져 있다. 새벽에는 아직 서리가 내리는 매서움이 남아있지만, 한낮의 따스함에는 자연스레 외투의 단추를 풀어헤친다. 

4월의 영월은 곳곳에서 벚꽃과 복사꽃을 함께 만날 수 있다.


영월에는 주천강, 평천강, 동강이 흐른다. 강줄기와 여기서 파생한 계곡을 따라 여행하는 것도 영월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자산(獅子山)에 있는 법흥사(法興寺)는 여행의 출발 지점으로 딱이다. 

영월군 수주면 사자산(獅子山)의 대표적인 문화재인 법흥사.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 중 한곳으로 대표적 불교성지다.

법흥사는 원래 신라의 자장율사가 흥녕사라는 이름으로 세운 사찰이다. 혜종 1년에 중건된 이후 891년 뜻밖의 화마로 소실됐다. 이후 944년 중건된 후 1902년 비구니 대원각을 다시 세우면서 법흥사가 됐다. 법흥사를 방문하면 일단 키 큰 전나무 숲길과 활엽수림이 눈을 사로잡는다. 게다가 봄의 법흥사는 주천강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즐기기에도 그만이다. 법흥사로 가는 길 곳곳에 캠프장과 글램핑장이 즐비한 이유도 계곡의 아름다움과 함께하기 위함일 것으로 보인다. 

법흥사를 나와 요선정(요선암)을 찾는다. 주천강 상류에 자리 잡고 있는 요선정은 1913년에 세워져 주천 청허루에 있던 숙종의 어제시(御製詩)가 모셔진 곳이다. 전국 어디에나 왕과 관련한 곳은 풍광이 수려하다. 요선정 역시 주위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주천강을 볼 수 있고 바위에 음각된 무릉리 마애불좌상과 돌개구멍까지 함께 감상할 수 있는 멋진 곳이다.

요선정은 요선암이라고도 불리며 숙종의 친필시가 모셔져있다.
요선정은 주천강 상류에 자리잡고 있으며 천해의 계곡의 위에 터를 잡고 있다.

주천강은 남으로 흐르다 영월의 또 다른 물줄기인 평창강과 합쳐진다. 북부 오대산 남쪽에서 발현하는 평창강은 영월의 서쪽을 흘러 서강이라고도 불린다. 평창강은 ‘한반도 지형’이라고 불리는 절경을 굽이쳐 주천강과 합류한 후 동강을 만나러 간다. 

한반도 지형도 빼놓을 수 없는 영월의 명소다. 이곳을 한반도 지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순 그 윤곽만이 아니라 내형까지 닮았기 때문이다. 동고서저의 전형적인 한반도 특성을 그대로 갖고 있으며 백두대간과 압록강 형상까지 절묘하게 겹쳐 보인다. 감입곡류하천(嵌入曲流河川)은 그 특성상 한반도와 비슷한 윤곽의 지형이 생기기 쉬운데, 유독 이곳의 명성이 가장 높은 이유다. 

한반도 지형을 내려와 강줄기를 따라 여행하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선돌 지역과 청령포도 감입곡류하천의 전형적 모습을 보인다. 선돌은 마치 거대한 바위가 쩍 갈라져 두 개로 나뉜 것처럼 보이는 데, 단종이 청령포로 유배를 가는 길에 이 돌을 보고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고 해서 선돌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유배길에 오른 단종이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고 칭송한 선돌.

영월에 오면 반드시 들려야 할 곳이 바로 단종의 묘인 장릉(莊陵)과 그가 머물었던 유배지 청령포다. 장릉에는 단종역사관도 함께 자리하고 있어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다. 역사관을 나와 언덕을 올라 마주하는 능은 왕릉이라 하기에 너무도 초라하다. 조선의 다른 권세가들 중에서도 이보다 화려하고 큰 묘에 누워있는 사람이 제법 있을 것이다. 아쉬움을 안고 장릉을 나와 몇 분을 운전하면 청령포가 나온다. 청령포는 평창강의 끝자락에 자리한다. 이곳은 지금도 배를 이용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평창강은 청령포를 지나 동강과 만나 남한강을 이룬다. 앞서 이야기했듯 영월에서 흐르는 강은 한양으로 흘러 세조도 마셨을 것이다. 이 물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곳에 단종을 유배 보냈다는 것은 아마 세조 자신도 단종이 깨끗한 인물이라 여겼던 것이리라. 단종의 죽음을 기록한 <연려실기술> <아성잡설> <축수록> 등에는 단종의 시신을 강물에 던졌다고까지 표현한다. 정말 극악무도한 대역죄인이라면 남한강 상류에 시신을 버리는 일을 묵인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수양대군은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극악무도하고 잔악한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청령포 어귀에서 떠올랐다.

왕의 묘라고 칭하기엔 너무 초라하지만 엄연한 왕릉이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 석양의 쓸쓸함과 어울려 만 가지 생각이 떠오르게 한다. 

조선왕조의 모든 국왕을 통틀어 유일하게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국왕(적장손으로 태어나 왕위로 오른)이면서 가장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단종에 대한 아린 가슴을 부여잡고 동강이 흐르는 지역으로 발길을 옮긴다.

평창강과 만나는 동강 또한 영월 여행의 중요 포인트다. 동강 줄기는 영월뿐만 아니라 정선군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정선군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서체의 이름이 ‘정선동강체’일 정도다. 

하지만 여행객들은 정선의 동강 못지않게 영월의 동강도 좋아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어라연을 중심으로 하는 동강의 절경 때문일 것이다. 어라연만 따지면 한반도 지형이나 선돌, 청령포와 같은 갑입곡류하천이라 특이할 것이 없다고 깎아내릴지 모른다.

하지만 어라연의 참모습은 생태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생태탐방로에서 찾을 수 있다. 봉래초등학교 거운분교장 근방에서 시작하는 탐방로는 어라연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잣봉’을 넘어 강변을 따라 돌아오는 3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코스가 유명하다. 

영월 동강의 자랑 어라연으로 가는 길. 생태숲이라는 칭호에 맞게 길이 험하다. 
어라연길의 끝자락. 잔잔한 강물과 기암절벽이 어울어져 장관을 이룬다.

실제 4월 중순에 강가 생태탐방로를 따라 걷다 보니 갈대숲, 복사꽃, 산괴불주머니 같은 다양한 식물들이 시원한 강바람과 함께 땀을 닦아준다.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의 정체가 궁금하면 탐방로 출입구에서 2분 남짓 떨어진 동강생태공원을 찾아가자.

어라연 외에도 동강을 따라 쭉 달리다 보면 차를 세워두고 시라도 읊고 싶은 절경들을 자주 마주한다. 조금 더 날이 풀리면 레프팅하는 관광객들에 의해 시끌벅적해지는 지역이나 아직은 오롯이 풍경만 즐길 수 있다. 서둘다 보면 자칫 지나칠 수 있는데 동굴바위도 반드시 전망대에 올라 감상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 글에서 소개한 지역 외에도 영월에는 숨겨진 아름다움이 넘쳐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곳을 눈에 담겠다고 덤비려면 단단히 맘을 벼르고 2~3박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그리 패키지여행처럼 의무감으로 다가서기엔 영월과 동강은 느긋하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작은 물병 하나 먼지 낀 카메라, 때 묻은 지도 가방 안에 넣고서’ 가벼운 발걸음을 닿는 대로 흐르는 것이 슬로시티(Slow City) 영월군을 즐기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동강 줄기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어디서 멈춰서도 절경이 눈에 들어온다. 

 

# 이 글은 국가물관리위원회 뉴스레터 9호에 실렸습니다.

국가물관리위원회 뉴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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