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속 끄적끄적

국내 최고 이공계 대학에 불어닥친 '일베' 논쟁

'일베', '일간베스트'

정말 듣기도 보기도 싫은 단어다.
한때는 철없는 어린아이들의 치기 어린 장난쯤으로 여겼으나 그것이 사회 문제가 되고 일부 보수 측(극우가 아니더라도)에서 정치적으로 이용까지 하다 보니 이제는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린다.

'일베', '디씨', '딴지', '루리웹', '오유', '여초', '워마드' 등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가 나름대로 정치적 성향을 띄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일베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들의 극우적인 성향과 더불어 많은 이용자가 청소년이라는 데 있다. 차별, 혐오가 넘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이들 인터넷 커뮤니티가 끼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KAIST에 불어닥친 '일베' 논쟁'

KAIST는 명실공히 국내 최고 이공계 대학이다. 
지난 10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지식재산 전문가 연례행사(IPBC 아시아 2019'에서 대학/R&D 분야 아시아 최고 지식 재산 리더로 선정된 대학이다. 이런 대학에 '일베' 현수막 사건이 벌어졌다. 문제는 아래 현수막에서 시작했다.

페이스북 '카이스트 대신 전해드립니다'에 올라온 경기북과학고등학교 면접 응원 현수막

설명에 의하면 북과 딱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는 일침과 "딱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샘플링한 음들로 일베에서 비하용으로 만든 노래에 자주 쓰인다고 한다. 성소자들을 뜻하는 LGBT를 이기북딱이라고 놀리기도 한단다. 거기다 '탈북'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해 논란을 키웠다.

이 글이 올라오자 "별 문제없어 보인다. 유머에 성역은 없다"라며 옹호하는 글과 "문제 있다"라는 글들이 싸우기 시작했다. 물론 심각한 문제라는 쪽이 월등히 많았고 현수막은 곧 철거했다. 

모르고 썼다 vs 그게 말이 되냐?

현수막 제작에 참여한 학생 측은 "'일베' 용어 인지 모르고 사용했다"라고 항변했고 학생들은 "그게 말이 되냐?"라고 되 받아쳤다. 한 학생은 경기북과고 학생 한 명과 연락해 솔직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현수막을 난잡하고 정신없는 콘셉트로 제작하려다가 북따다다닥이라는 단어가 어디선가 들어봤던 것 같은데, 장단 같기도 하고 콘셉트에도 잘 맞는 것 같아서, 그래서 논란의 문구를 가운데에 섞은 거라고 하더군요. 맹세코 일베 용어를 섞어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현수막을 만들려는 의도가 아녔다고 합니다. 물론 해당 기수의 모든 학생이 그 단어의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현수막 제작에 주로 참여했던 친구들은 그 단어의 뜻을 모른 채 문구에 넣었고, 단체 카톡방에서 최종본을 검토할 때 일베용어이다 라는 얘기가 없었기에, 논란이 될 것이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찌어찌 현수막 관련해서 제작한 경기북과고 13기 학생들과 선배인 12기 학생들의 사과문이 올라오고 마무리되는 듯싶었으나 온라인 상에 한 번 올라온 이상, 그것도 KAIST에서 벌어진 이상 뉴스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손이 근질거렸으니. 하지만, 특별히 피해를 본 사람이 없었고 이미 페이스북의 '~ 대신 전해드립니다'의 순기능에 대해선 배재대 건을 통해 한 번 다룬 적이 있어 기사화까지는 참았다. 하지만 나만 그랬던 거지 다른 기자들에게는 좋은 기사거리인 것은 맞았다. 결국 디스패치 등을 통해 인터넷 상에 기사가 올라왔고 포털에 떴다. 일순간 KAIST는 '일베가 다니는 학교'가 돼 버렸다. 

언론 공개 후 격해진 반응들

그러자 제보자를 탓하는 글이 보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어떻게 인터넷상에서 사건이 점점 퍼지고, 그걸로 물의를 일으킨 사람이 동시에 참혹한 피해자가 되는지 잘 보고 있습니다"라거나 제보자에게 "제보하고 인터뷰까지 해서 기사 띄울정도면 증오와 원망이 가득 찬 걸로 생각되는데 그냥 불편해서 그런 거면 상담받아보세요"라는 글까지 올라왔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제대로 짚고 가자라는 의견도 있다. "언론에서 언급하는 상황에서 덮으려고 쉬쉬하지 않고, 제대로 책임 소재/책임자들을 밝혀내서 처벌을 해야, KAIST가 자정 능력을 갖춘 학교 공동체라는 것을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친구도 있다. 그런데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건 좀 쉽지 않을 것 같다.

논란이 거칠어 지자 '카이스트 대신 전해드립니다' 페이지 관리자가 나섰다.

"지난 이틀 동안 경기북과학고 현수막 문구 일베 논란 관련하여 많은 제보와 댓글이 작성되었습니다. 카이스트 학생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는 카대전인 만큼, 특정 주제로 도배된 카대전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관리진의 판단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오늘 지금 이 순간부터 1주일 동안 경기북과학고 현수막 문구 일베 논란 관련 주제들에 대해 1차 쿨타임을 적용합니다"

이 아이들도 같은 청소년이다

이 논란에 다시 한번 놀란 것은 "'KAIST'에 들어올 정도 되는 아이들도 '일베'를 아는구나"였다. 학교 다닐 때 공부만 했을 것 같았던 아이들이 '일베', '디씨' 같은 사이트에 신경을 쓸 시간이 있었을까 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들도 우리 아이들과 똑같은 일반 청소년일 뿐이었던 거다. 

정말 경기북과고 학생들이 모르고 저 말을 인용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일베' 용어라는 것을 알아차린 아이들이 있었다는 건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들도 인터넷을 하고 누군가는 커뮤니티에 들어가 활동을 할 정도의 시간은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나도 '북딱'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이번에 겨우 알았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스스로 자성의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에 아직은 미래가 어둡지는 않다고 안도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련다. 

그나저나 이거 실수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일베 용어사전 뒤져 봐야겠다. 모르고 쓰고 있는 단어가 꽤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