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가 1992년이었는지, 1993년이었는지 이제는 가물거린다.
20살을 갓 넘긴 햇병아리였던 나는 강남역 뉴욕제과 뒷편에 있던 작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5천원짜리 이상되는 티셔츠도 입어본 적이 없던 촌놈이 강남이라는 대한민국 노른자의 한가운데 서 있다보니 모든게 신기하고 어리둥절했던 시절.
그러던 어느날 그 곳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 전태관을 만났다. 지금이야 그들 이름도 알고 밴드명도 알지만 당시엔 처음보는 뮤지션이었을 뿐 흥미도 없었다. 우연찮게 전태관씨에게 3집 '농단, 거짓말 그리고 진실' CD를 선물받기 전까진 말이지. 그리곤 결론적으로 '전람회 1집'과 함께 그시절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가요음반이 되어버렸다.(두 분의 사인까지 고이 받은 CD였는데 군 제대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울화통!!!) 당시 우리 회사 옆에 3DCOMPUTER(회사명이 맞나?)라는 회사가 있었는데 일하는 누나들이 예뻤다. ㅋㅋㅋ 그게 아니라 이 업체가 재미있는 회사였는데 TV방송 프로그램의 3D CG를 외주를 받아 제작(당시 가족오락관의 오프닝을 제작했던 기억이 난다)하기도 하면서 컴퓨터 음악 장비들을 수입판매하는 회사였다. 자체 스튜디오까지 가지고 있어 음악을 좋아하던 내가 자주 놀러갔던 회사(야근이 길어지면 집에 가지 않고 스튜디어에서 놀다가 밤을 세우기도 했었던). 그 회사에 장비를 구입하러 다니던 뮤지션들도 꽤 많았다.
봄여름가을겨울은 당시 탐닉하고 있었던 김현식의 백밴드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라디오에서 간혹 흘러나오는 '어떤이의 꿈'이나 김현식의 곡을 리메이크한 '봄여름가을겨울' 정도가 내가 아는 지식의 모든 것이 었다.
(숨은그림찾기 : 김종진, 전태관. 빛과 소금의 장기호, 박성식도 찾을 수 있다)
아무튼 지금은 3집 이야기를 하는 중이니까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미국 현지의 사운드를 샘플링한 '멀리서 보내는 편지'가 잠깐 흘러나온 후(앨범 사진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우리 미국에서 작업했소'라는 냄새를 풍기려고 노력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전태관의 드럼소리로 포문을 여는 '농담, 거짓말 그리고 진실'이 시작된다. 펑기한 사운드와 함께 이정식의 섹소폰, 그리고 김종진의 기타소리가 시작부터 맘을 확 잡아끈다. 이 앨범은 보컬곡보다 연주곡들 중에 맘에 드는 곡들이 더 많은데 이런 펑키한 리듬과 브라스세션이 많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결국 개인 취향이었단 말이지.그러던 내가 이 앨범을 플레이어에 걸고 곱씹어보면서 이들에 대한 무한 애정이 생겼다(스튜디오에 있던 장비들이 고가라 제대로 음향이 뽑아줘서 더 감동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국내 최초로 앨범 전체를 미국에서 작업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지금 들어봐도 사운드가 아주 잘 잡혀있다. 물론 이 후의 4집도 같은 방식으로 미국작업을 택했고 대중성보다는 음악적 완성도를 위해 더 노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왠지 3집에 비해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4집은 아직 제대로 된 시스템에서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럴지도). 평론가들은 4집을 이들의 최고 음반으로 꼽는 경우가 많다. 결론적으로 내 귀가 좀 더 저렴하다는 의미겠지?
신나는 연주곡을 듣고 나면 걸죽한 김종진의 보컬이 매력적인 '그대 향한 그리움을 이젠 내게'가 흘러나온다. 이 후, 이 앨범에서 가장 많이 방송을 탔던 '10년전의 일기를 꺼내어'를 들을 수 있다. 김종진의 나레이션과 보컬은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린다. 개인적으론 '송골매의 배철수 -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 - 버스커버스커의 장범준'으로 밴드의 막걸리 보컬이 명맥을 이어져왔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구수하단 뜻. 어쩌면 이들의 음악이 한국적이게 만드는 가장 큰 특징이 김종진의 보컬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이 곡의 나레이션 부분의 오글거림은 나도 참기가 힘들다. 헤헤헤.
베이스 연주가 기똥찬 또 하나의 연주곡 '길고도 말하기 힘든 얘기'가 지나면 故유재하의 작품인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김종진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유재하와 봄여름가을겨울은 故김현식의 백밴드 시절 함께 연주했던 경력이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 때문에 김현식도 유재하의 곡을 여러곡 부른적이 있지 않은가? 물론 김현식이 김종진의 곡을 부른 것도 있다.
담담한 이 노래가 끝나고 나면 이정식의 섹소폰 연주가 매력적인 잔잔한 연주곡 '나 모르는 한적한 곳에서'가 흐른다. 이 후 팝성향 강한 '그대 사진에 입맞춤'이 지나고 문제의 연주곡 'Don't do That, Burt!'가 흘러나온다. 이 들이 이렇게 그루브감 충실한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놀랍다. 미국 현지 세션들의 능력도 다소 가미가 된 것이겠지만 김종진, 전태관의 음악적 재능에 깜짝 놀라게 한 곡이다. 무지하게 짧은 이 곡이 아쉬우면서도 가장 애착이 간다.
펑키, 재즈, 발라드 등 다양한 음악을 선보인 후 '10년 전...'과 더불어 히트곡 중 하나인 하드락 넘버 '아웃사이더'가 휘몰아친다. '봄여름가울겨울이 이런 강한 하드락 연주를?'이라고 느낄 정도의 강렬한 곡이다. 그런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앨범에서 가장 튀는 곡이자 사랑을 많이 받았던 곡이다. 시원한 락 넘버가 끝난 후 또 하나의 발라드 '혼자라고 느낄 때'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전태관의 드럼과 섹소폰 연주가 잘 버물린 멋진 연주곡 '내게 만약...'과 앨범의 마지막 보컬곡 '외로운 사람들'이 지나면 첫 곡이었던 '멀리서 보내는 편지'의 Outro격인 '오랜 시간이 흘러'가 흐르면 장장 14곡의 대장정이 마무리 된다.
팝, 발라드, 재즈, 펑키 등 다양한 장르를 한 앨범에 녹여 놓은 봄여름가을은 서로 다른 이 들이 한장의 CD에 살고 있어도 어색하지 않게 만드는 마술을 부린 듯 하다. 처음 제대로 접한 이 들의 음반이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존경해 마지 않는 김중만 작가님의 사진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도 이 음반의 마력에 빠져있다. 어찌보면 그 들의 음반 중에서 가장 평가절하되고 있는 앨범이 아닌가하는 아쉬움도 남고... 서태지의 등장으로 난리가 났던 때니까 아쉬움은 더하다.
사족이지만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님같으신 인물이 우리나라 음악계에 더 많았으면 좋겠다. 동아기획에서 기획되고 발매되는 음반들을 기다리는 이는 나뿐이 아닐텐데 말이다. 돈이 왠수지. 그 놈의 돈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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