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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오늘 한 꼭지

현대인의 놀이문화를 책임지는 닌텐도

우리나라 명절의 집안 풍경을 생각해 보자.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바닥에 담요 한 장 깔아 놓고 작은 카드를 들고 고와 스톱을 외치기에 여념이 없다. 어른끼리 약간의 현금을 놓고 친목을 위한 카드놀이를 즐기고 있는 반면 아이들은 너나없이 조그마한 액정이 달린 스마트 폰이나 휴대용 비디오 게임기에 얼굴을 들이대고 연신 버튼을 눌러댄다. 물론 모든 가정이 이러한 풍경은 아니겠지만 스마트 폰에 빠져있는 젊은 층을 제외하곤 집 안에서 놀 수 있는 놀이기구 중 최고는 바로 화투와 휴대용 비디오 게임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가지 놀이기구가 하나의 기업에서 개발한 제품이라는 것이다. 바로 일본의 유명 비디오 게임 개발 회사 닌텐도(NINTENDO)다.

닌텐도 스위치 광고 이미지 Ⓒ닌텐도

지금이야 닌텐도 하면 휴대용 비디오 게임기 닌텐도 스위치를 개발한 기업으로 알고 있지만 그들의 역사를 거슬러보면 맨 처음에는 화투가 등장한다. 단순한 카드를 제작하던 회사가 어떻게 세계 최고의 비디오 게임 회사의 반열까지 오르게 되었을까? 초대 사장 야마우치 후사지로부터 ‘마리오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야모토 시게루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닌텐도의 역사를 돌아보자.

화투 제작으로 승승장구

닌텐도의 역사는 1889년 9월 23일, 유명한 공예가였던 야마우치 후사지로가 교토 시의 한 지역에서 ‘닌텐도 카드’를 세우고 화투의 제조, 판매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닌텐도 카드의 화투는 교토와 오사카에서 판매가 시작됐고 지역의 도박장에서 사용되게 되면서 사업이 커지게 된다. 닌텐도 카드에서 만든 ‘대통령표 화투’는 당시의 미의식에 걸맞은 유려한 디자인과 색감 덕에 전국적인 브랜드로 성장하게 되고 대중들의 대표 놀이기구로 번성하게 되었다. 닌텐도 카드는 창업가인 후사지로가 사망할 무렵에 이미 일본 최대의 카드 회사로 성장하게 되었다.

닌텐도의 화투 광고 Ⓒ위키미디어


닌텐도가 본격적으로 전자산업에 뛰어든 것은 3대 사장인 야마우치 히로시 때부터다. 야마우치 히로시는 와세다 대학을 중퇴하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사장에 취임한다. 이미 거대 회사로 성장해 버린 닌텐도 카드에 대학을 중퇴한 젊은 사장이 자리에 앉는 것을 당시 직원들은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 약 100여 명 고위 사원들의 비난이 빗발같이 쏟아지게 된다. 하지만 히로시 사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놀라운 결단력과 낙관 주위로 비난을 이겨내게 된다. 

히로시 사장의 최초 히트상품은 플라스틱 트럼프다. 이미 닌텐도 카드는 화투뿐 아니라 트럼프 제작도 겸하고 있었는데 1953년 일본 최초의 플라스틱 트럼프를 히로시 사장이 탄생시킨 것이다. 1959년에는 미국의 디즈니사의 라이센스를 취득해 디즈니 트럼프를 발매하기도 하고 TV 광고와 상품 내 놀이 설명서를 동봉하는 방법 등을 채택해 놀라운 판매 효과를 거두게 된다. 

탈 카드 산업 도모...시작되는 전자 완구 산업

하지만 카드 산업은 히로시 사장이 기대하는 만큼 거대 산업이 아니었다. 1956년 세계 최대 트럼프 메이커인 US 프레잉 카드사에 시찰을 가게 된 히로시 사장은 생각보다 작은 규모의 회사에 크게 실망하게 된다. 세계 최고가 되어도 카드 회사로는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히로시 사장은 탈 카드 회사를 꾀하게 된다. 이때 바로 전자산업으로 뛰어든 것은 아니다. 러브호텔, 택시 회사, 식품 산업 등의 운영을 거치게 되지만 어느 것 하나 신통한 것이 없었다. 결국 히로시는 닌텐도가 최초에 가지고 있던 놀이 문화로의 회귀를 결정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것이 바로 완구 산업이다. 닌텐도는 6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완구를 제작해 시장에 내놓았다. 하지만 토미나 반다이 같은 기존의 거대 완구회사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시행착오를 겪어나 간 히로시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전자 분야에 회사의 사활을 걸게 된다. 그렇게 닌텐도의 전자 산업은 시작됐고 서서히 정상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1966년 ‘울트라 핸드’라는 제품을 140만 개나 팔아치운 닌텐도는 이후 1968년 기존 제품의 두 배가량의 가격이 책정된 ‘울트라 머신’을 개발해 상품화한다. 전기로 탁구공을 발사하는 소형 기계였지만 이 또한 대 히트를 거뒀다. 이후에 잠망경을 모델로 한 ‘울트라 스코프’, ‘쇼트 레이서’, ‘살맨 트럼프’, ‘러브 테스터’ 등의 전자 완구를 꾸준히 개발 판매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성공해서 벌어드린 돈도 다른 사업에 손을 대는 바람에 몽땅 날려버리고 회사는 빚더미에 앉게 된다. 그래도 당시까지 꾸준히 생산하고 있던 화투, 트럼프 덕에 근근이 회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1970년에 휴대 전등의 전구, 전지와 셔터로 소총에서 광선을 발사하는 ‘광선총’, ‘광선총 SP’ 등이 대히트를 치면서 전자 공학을 활용한 상품이 새로운 놀이를 제공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출시된 레이져 클레이 사격 시스템이 다시한번 공전의 히트를 하게 된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닌텐도도 중동 전쟁으로 인한 석유파동에 또다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도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새로운 전자 공학 기술 습득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던 중 1975년 미쓰비시 전기에서 컬러 TV 게임기 개발 요청이 들어온다. 이를 기회로 생각한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저렴한 가격의 컬러 TV게임 6, 컬러 TV게임 15를 발매하게 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를 통해 닌텐도는 본격적으로 가정용 TV 게임기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것이다.

컬러 TV게임 6 Ⓒ위키미디어


미스터 비디오 게임, 마리오의 탄생

당시 일본은 타이토의 아케이드 비디오 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말 그대로 도시를 침공한 상태였다. 모든 일본인이 이 게임에 열광하고 빠져들면서 닌텐도를 아케이드 게임시장에 뛰어들게 한다. 그때가 1977년. 그리고 드디어 ‘마리오의 아버지’ 미야모토 시게루가 닌텐도에 입사하게 된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1980년 닌텐도에서 뉴욕 맨해튼에 설립한 NOA(Nintendo of America, 후에 시애틀로 옮겨가게 된다.)를 통해 새로운 게임 제작을 의뢰받게 된다. 의뢰 후 최초로 구상한 게임은 바로 ‘게임 & 위치’의 뽀빠이 게임이었다. 그리고 후에 미야모토 시게루와 닌텐도의 또 다른 공신 요코이 군페이에 의해 동키콩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개발자들에게 아저씨라고 불렸던 캐릭터 마리오(당시 미야모토 시게루는 기획서의 일러스트에서 이 아저씨를 미스터 비디오 게임이라고 정했으며 훗날 마리오라고 이름 붙여지게 된다.)가 탄생한다. 미국 시장을 겨냥한 닌텐도의 동키 콩이 마리오와 함께 탄생한 것이다. 1981년 발매된 게임은 물론 대 히트를 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동키 콩과 그 안의 주인공이었던 마리오는 지금도 닌텐도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동키 콩 게임기 Ⓒ위키미디어



닌텐도는 1980년 개발된 게임&워치를 통해 휴대용 게임기의 서막을 열었다. 그리고 1982년 2개의 액정 화면을 사용한 ‘게임 & 워치 멀티스크린’이 등장해 또 한번 게임 시장을 놀라게 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3DS를 넘어서 지금의 스위치까지 이어져 오게 된 것이다. 그 사이 닌텐도는 가정용 게임기 페미콤, NES(Nintendo Entertainment System), 게임보이 등의 역작을 계속해서 탄생시켰다. 하드웨어뿐 아니라 게임 소프트웨어에서도 앞서 말한 동키 콩은 물론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젤다의 전설, 포켓몬스터 시리즈, 동물의 숲 등 비디오 게임계의 전설 같은 명작들이 줄줄이 쏟아지며 비디오 게임계의 왕좌에 등극하게 된다.

닌텐도 최초의 휴대용 게임기 게임&워치 Ⓒ위키미디어

최근 들어 닌텐도는 소니, 마이크로소프트, 스마트폰 등의 신흥 경쟁자들에 공격적인 도전을 받고 있다. 하지만, 아직 왕좌의 자리를 선뜻 내줄 생각은 없는 듯하다. 작은 화투 가게에서 시작한 닌텐도는 처음 시작했을 당시의 초심인 놀이 문화를 놓지 않고 이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노력을 통해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이다. 몇 번의 부도 위기에 굴복해 계속된 기술 개발과 습득을 거쳐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슈퍼마리오와 포켓몬스터를 영영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