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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끄적끄적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나는 좋아하는 것이 꽤 많은 녀석이다. 음악, 영화, 소설, 축구, 야구, 비디오게임, 사진 등 어마어마하다. 물론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대부분 이것들을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음악의 경우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먼저 좋아했는지 들 고양이의 ‘마음 약해서’를 먼저 좋아했는지 알 수 없다. 아무튼 대부분 나의 기억 메모리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는데 유독 시(詩)라는 녀석은 언제 좋아하기 시작했는지 확실히 기억한다.



내가 처음 입학한(졸업은 다른 곳에서 했기에) 중학교는 당시 단한 번의 졸업생도 배출하지 않았던 새로운 학교였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의욕 넘치는 젊은 분들이었다. 당시 담임은 영어선생님이셨는데 안타깝게도 여성이었다는 것만 기억에 있을 뿐 얼굴도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 학교에선 오직 실베스타 스텔론을 닮았던 체육선생님(하키부 코치였다)과 내게 시를 선물하신 국어선생님 뿐이다.(그나마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 수많은 은사님 중 기억나는 이름은 단 한 분이다.)


국어 선생님은 분위기가 좋거나 미인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음침하기까지 했던 여성이셨다. 목소리까지 저음이라 남자들에겐 인기가 별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지금 생각해보니 여자애들에겐 인기가 좋았을 수도 있겠네.) 아무튼 이 선생님께선 김소월 시인의 열렬한 팬이셨다. 거의 추종자에 가까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선생님께서는 시를 배우는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수업 전 꼭 한 편씩 소개해 주셨다. 항상 그 낮은 목소리로 멋지게 낭송을 해주셨는데 그 첫 번째 작품이 바로 김소월의 초혼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초등학교를 다닐 때 무슨 시를 배웠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때처럼 강렬하게 문구 하나하나가 가슴을 때렸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사랑하는 그 사람이여! / 사랑하는 그 사람이여!”


마무리 될 때까지 아주 넋을 놓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곤 난 시를 좋아하게 됐다. 그렇다고 막 찾아 읽고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책을 사볼 용돈도 없었고 어떻게 빌리는 줄도 몰랐으니까. 그저 국어시간을 기다리고 선생님이 낭독해 주시는 구절에 심장을 태웠던 것 같다. 그 분의 수업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전학을 가 버린 것이 얼마나 한이 되었던지. 선생님을 떠난 후부터 시집이라는 것을 사보고 시라는 것을 써보기도 했던 것 같다.


김소월의 시를 좋아했고(시집을 사기 전까진 김소월이 여성인 줄 알았다. 아마 그러게 생각했던 사람 많지 않았을까?) 이혜인 수녀와 워즈워드의 시를 많이 좋아했다. 그러다가 초혼만큼이나 가슴을 때렸던 시를 만났는데 그 작품이 바로 류시화 시인의 ‘소금인형’이다. 가수 안치환이 곡을 붙여 노래하도 했었다. 이 시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한 동안 모든 인터넷의 아이디가 ‘소금인형’이었던 적도 있다. 지금도 MBC의 한 라디오프로 DJ께서는 이 이름으로 날 기억하신다. 아는 이들중에서도 이름대신 '소금인형'이라 부르는 애들이 많다. 소금인형이 내게 준 파장은 매우 큰 것이었는데 시를 쓰게 만든 것이다. 색칠을 할지 몰라도 그림은 그릴 수 있고, 음계를 몰라도 노래는 할 수 있듯 좋은 글을 쓰지 못해도 시는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고3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노트에 1,000편까지 쓰기도 했다. 이 개인 시집을 당시 여자 친구에게 선물했는데 지금은 복사본도 남아있지 않다. 소중히 간직해 달라며 전한 노트였건만 헤어진 후 새로 생긴 남자친구 때문이었는지 버렸다고 했다. 불태운 것도 아니고 그냥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다. 이 후 엄청난 진리를 깨닫게 됐다. 여자에겐(설사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함부로 선물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아내에겐 그 때 썼던 시의 일부와 새로 쓴 시를 합쳐 100편 정도를 책으로 묶어 선물했다. 물론 원본은 남겨두고. 그때도 그렇고 지금 봐도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시만큼 마을을 잘 나타내는 방법도 없었던 것 같다.


새로운 시를 읽어본 적이 너무 오래된 것 같다. 최근에는 시보다는 에세이나 수필에 빠져 시를 멀리했다. 류시화 시인이 올해 새로운 시집을 내셨다니 가을이 되면 꼭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식어가는 심장을 다시 태우기 위해 노트에 시구도 적어봐야겠다고 다짐한다.